사회복지사가 되고 싶어 마흔의 나이에 대학에 들어간 박모(44/여)씨. 그는 최근 꿈을 접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5개월 동안 우울증 치료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2007년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한 노인복지시설에  취직했지만, 우울증 병력이 알여지며 채용이 취소됐다.

간호과장은 "우울증 치료 경력이 있으면 자격증 발급이 안 된다"고 취소 이유를 설명했다. 이듬에 사회복지관 직원 공채에 응시했지만 떨어졌다. 박씨는 이 역시 우울증 치료 이력이 문제가 된 것 같다고 짐작한다. " 우울증이 심해서가 아니라, 약을 먹으면 빨리 나아진다기에 치료를 받은 건데...." 그는 "지금은 사회생활에 아무 지장이 없는데 25년 전의 우울증 병력이 내 꿈을 막고있다."고 울먹였다.

현행 정신보건법은 병의 경중을 가리지 않고 정신질환자를 한 묶음으로 분류한다. '마음의 감기'로 불리는 우울증을  앓은 환자나 치료가 어려운 정신분열, 치매를 앓는 환자나 모두 같은 정신질환자로 분류되는 것이다.

문제는 간호조무사, 약사, 위생사, 영향사 등 11가지 직업 관련 법률이 정신질환자는 자격증을 딸 수 없게 제한하고 있다는 것. 정신질환자는 산후조리원이나 보육시설 등도 운영할 수 없다. 이 같은 제약 때문에 많은 직장인이 정신과 치료를 망설이거나 치료 사실을 숨긴다. 산후우울증을 앓고 있는 정모(35/여)씨는 5개월째 친정어머니 이름으로 병원을 다니고 있다. 진료 기록이 드러나면, 출산 휴가가 끝나도 복직이 안 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3년 전 불안하고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에 병원을 찾은 황모(43)씨는 3개월 정도 공황장애치료를 받다가 병원ㅇ르 더 이상 가지 않았다. 그는 "치료기간이 길어지면 직장에서 진료 기록을 알게 될 것 같다"며 치료를 거부했다.

우울증, 불안증 같은 가벼운 정신질환에게 씌워진 'F코드(정신질환을 가리키는 국제질병분류 기호)'의 덫이 사라질 전망이다. 국민권익위원회는 정신보건법에 규정된 정신질환을 경증과 중증으로 구분하고, 경증 정신질환자에겐 자격증이나 업종 신고 자격을 제한하지 않도록 관련법을 개선하라고 보건복지가족부에 11일 권고했다. 보건복지가족부는 "권익위 권고에 앞서 개선안을 준비 중이었으며 조만간 법개정이 가능할 것 같다"고 밝혔다.

권익위의 개선안에 따르면 정씨나 황씨 같은 경증 질환자들은 직업상 불이익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정신과 의사가 '상당 기간 사회생활 및 특정 업무를 수행할 수 없다'고 진단한 중증 정신질환자만 직업 선택에 제한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권익위 제도개선 담당관실 신동택(49) 사무관은 "중증 질환자가 대중을 접촉하는 것은 막으면서도. 200만 명 이상의 경증 환자들이 자유롭게 경제 활동에 참여하는 길을 연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울특별시 은평병원 정재열(39) 정신과 과장은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증은 누구나 감기처럼 걸릴 수 있는 병이 됐다"며 "경증 정신질환자에게 찍힌 낙인을 없애면 이들이 마음편하게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권익위는 경증 정신질환자를 따로 분류함으로써 모든 정신질환자에 대해 보험 가입을 제한하는 관행도 개선될 것으로 보고 있다. 보험사들은 정신질환을 앓은 적이 있는 환자는 생명보험은 물론 화재보험까지 가입할 수 없게 제한한다. '심신미약자와 심신박약자의 생명보험계약을 무효로 한다'는 상법 규정을 내세우고 있다. 권익위 관계자는 "정신질환자에 대한 정의가 바뀜으로써 보험 약관 개선을 촉구할 기반이 마련됐다"고 말했다.


                                         <중앙일보/ 2009. 8. 12 / 정선언 기자>